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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실] 「프랑켄슈타인」그는 정말 괴물이었을까?

구슬꿰는실 2024. 8. 28. 23:31

 

 

 


「프랑켄슈타인」그는 정말 괴물이었을까?

 

 

 

고진실

 

 

 

너무나 익숙한 이름 프랑켄슈타인, 많은 사람이 큰 키에 천을 덧댄 듯이 기워져 있는 푸르스름한 피부, 머리에 나사가 박힌 모습을 떠올릴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 존재의 이름은 프랑켄슈타인이 아닙니다. 그를 만든 박사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을 가져온 제목입니다.

 

정체가 분명하지 않지만 남과 다른 외모를 가진 그는 이름 없는 괴물일 뿐입니다. 섬뜩한 공포의 대상으로 상징되던 그가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불린 적이 없는 무명의 존재였다는 것을 책을 읽고 나서 알았습니다. 새삼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여운이 짙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현장 또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사회의 소수, 약자를 생각했습니다.

 

특히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했기에 신체적으로 남들과 다른 모습을 가진 것으로 차별의 대상이었던 많은 장애 당사자가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쪽까지 사회복지사로서 내 일을 대하는 태도,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점검하며 읽었습니다.

 

 

 

왜 그는 괴물로 불렸을까

 

“그 누런 살갗은 그 아래 비치는 근육과 혈관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흑발은 출렁거렸고 이빨은 진주처럼 희었지만, 이런 화려한 외모는 허여멀건 눈구멍과 별로 색깔 차이가 없는 희번득거리는 두 눈, 쭈글쭈글한 얼굴 살갗, 그리고 일자로 다문 시커먼 입술과 대조되어 오히려 더 끔찍해 보일 뿐이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김새,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외모를 가진 그는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존재 자체로 괴물이 됩니다. 그를 만든 박사마저 그 모습을 혐오하여 버리고 도망칩니다.

준비 없이 세상에 혼자가 된 괴물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합니다. 숲에서 굶주림을 해결하고 고통 속에 흐느끼며 시간은 흐릅니다. 자연에 적응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홀로 지식과 정보를 학습합니다. 그렇게 아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괴물은 점차 사회화합니다.

먹고 자고 입는 것, 본능적인 기본 욕구를 해소하는데 충실했던 괴물은 축사에서 만난 가족들이 주고받는 언행을 보고 감정을 교류를 알게 됩니다. 자식을 향한 노인의 사랑 가득한 미소를 보고 굶주림이나 추위, 온기나 음식 등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특별하고 강렬한 감각을 느낍니다.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욕구, 그들과 섞여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지지만 동시에 자기 모습이 남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합니다.

 

“상상 속에서 수천 번 그들에게 나를 소개해보고, 그들의 반응을 그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들도 혐오감을 느낄 테지만, 온화한 행동거지와 달래는 말씨로 먼저 호감을 얻고 나면 나중에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상상했다.”

 

노력에도 괴물은 사람들과 섞이지 못합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가족에게 모습을 드러냈지만, 설명할 시간도 없이 그 외모 때문에 쫓겨납니다. 빅터를 비롯한 그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이미 괴물이 된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채우지 못한 외로움의 자리엔 증오가 자랍니다.

 

“어떻게 해야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지? 아무리 애원해도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 호의를 보일 수 없단 말인가? 이렇게 당신의 선의와 연민을 갈구하는데도? 나는 선했고, 내 영혼은 사랑과 박애로 빛났다. 하지만 나는 외롭지 않은가? 참담하게 고독하지 않은가?”

“어디에서나 축복을 볼 수 있건만, 오로지 나만 돌이킬 수 없이 소외되었다. 나는 자애롭고 선했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라, 그러면 다시 미덕을 지닌 존재가 될 테니.”

 

사람은 생리적 욕구 외에 더 고차원의 것, 어딘가 소속되어 애정을 나누고 타인에게 존중받으며 사는 동안 끊임없이 자기 성장 성숙을 도모하는 존재입니다. 이 순간 괴물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물질이 아닌 있는 그대로 자기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해 줄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기쁠 때 함께 기쁘고, 슬플 때 같이 슬퍼할 사람, 우정을 나눌 관계가 필요했습니다.

 

「희망 대신 욕망」이라는 책에서 작가 김원영은 자신의 든든한 친구이자 후원자인 두 사람과의 만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는 서로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었지만, 선정 누나 역시 혜원 누나의 말만 듣고도 나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고 한다. 나는 그때까지 전혀 특별한 인간이 아니었지만, 이 두 사람 덕분에 정말 <특별한 아이>가 되기 시작했다’

 

혜원 누나처럼 여느 사람과 달리 나를 먼저 특별하게 봐준 사람, 강점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사람, 남과 다른 점을 이상하게 보지 않고 별다르지 않게 대해주는 사람의 존재가 우리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합니다.

 

눈에 띄는 외모만 소외와 차별의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외모 외에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은 많았습니다.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체제에 속해있는가 혹은 불응하는가, 얼마나 많은 부와 명예를 가졌는가, 가족 친척 친구 같은 상호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가와 같은 기준들은 표준이나 정상이라고 규정된 범주를 넘어가면 배제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표준, 정상이라는 개념들도 결국 사회가 만드는 것이기에 늘 변합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만나는 당사자와 주민, 나를 포함하여 누구도 이런 기준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언제든 다수의 무리에서 떨어져 소외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재산 분배며 막대한 부와 누추한 빈곤, 계급, 가문, 그리고 고귀한 혈통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말들은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 이들 중 하나만 갖고 있어도 존경받고 살 수 있지만, 둘 다 없으면 아주 희귀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선택된 소수를 위해 자기 힘을 무의미하게 소모해야 하는 방랑자나 노예로 간주 되는 것이다.

 

괴물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다른 전개로 이어졌을지 모릅니다. 상대적으로 크고 유연한 몸, 민첩한 행동과 척박한 환경에서도 견디는 생명력은 남들과 다른 점이자 괴물의 강점이었습니다. 오히려 소인국의 ‘걸리버’처럼 영웅으로 활약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과 어울렸을 때 그만의 역할로서 빛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어울릴 사람과 머물고 싶은 곳

 

그러나 내 친구들과 친척들은 어디에 있는가? 내 유년기를 지켜본 아버지도 없으며 미소와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축복해준 어머니도 없다. (…) 기억이 나는 첫 순간부터 이미 나는 그때와 똑같은 키와 덩치였다. 그때까지 나를 닮은 존재도, 나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엇일까? 그 질문이 또다시 튀어나왔지만 대답이라고는 신음뿐이었다.

 

삶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탐구의 과정이라고 하던가요? 나를 둘러싼 환경, 다양한 관계에서 나는 다르게 정의되고 설명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부대껴 사건 사고를 경험하며 자기 정체성은 구체적이고 분명해집니다. 괴물에게는 이렇게 교류할 관계가 없었습니다. 관계가 부족하면 풍성한 경험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인과 교류 없이 만들어진 정체성은 유약하여 쉽게 흔들립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근원적 물음 앞에 답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제, 온 세상을 앞에 둔 나는 어디로 걸음을 옮겨야 할까? 불행의 현장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증오와 경멸을 한몸에 받는 내게 어느 나라건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피해 떠나왔지만 다른 갈 곳이 없습니다. 어딜 가든 거부당하는 삶이라면 어디서도 행복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가 원하는 자리는 거칠어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며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나를 위해 여자를 만들어달라. 내 존재에 필요한 공감을 함께 나누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건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 요구는 당신이 거절할 수 없는 내 권리의 주장이다.”

“당신이 내려줄 동반자와 함께 인간과 가까운 지역을 떠나 최대한 야생의 장소에서 살아가겠다고. 연민을 만나는 순간 사악한 정념은 모조리 사라질테고 내 인생은 조용히 흘러갈 것이다.”

 

괴물은 빅터에게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다른 존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한 사람만 있다면 세상과 단절되어 괴물로 살아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가 바란 유일한 것은 평범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뿐입니다.

빅터가 자신을 없애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괴물은 계속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잡힐 듯 말 듯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쫓겨 다닙니다.

 

괴물은 정말 쫓기는 것일까? 반대로 빅터를 쫓는 것은 아닐까? 사람보다 큰 힘을 가진 괴물은 일부러 쫓기는 구실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사람이 그리웠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빅터와 가까이하고 싶었습니다. 괴물이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지만 그가 죽자마자 괴로워하며 스스로 소멸합니다.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빅터, 한편으로는 내 존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자 세상에 있게 한 사람입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지금 나를 잠식하는 고통도 더이상 느끼지 못할 테고, 채울 수도 꺼뜨릴 수도 없는 정념의 먹이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나를 존재하게 만든 이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 두 사람의 기억도 금세 사라지겠지 (…)

 

‘사람이 진정 죽는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혔을 때다.’ 유명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빅터의 죽음으로 괴물도 더이상 자신을 기억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괴물이 지역사회에서 어울려 살았다면

 

현시점 지역사회에 어울려 살았을 모습을 그려봤습니다. 어느 때보다 자원과 서비스가 풍부한 시대.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우리는 그를 위해 인간사회의 문화나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등록하고 자원봉사자를 소개합니다. 혹은 그만을 위한 특별한 ‘괴물 전용’자원을 만듭니다. 빅터와는 갈등 관계에 있으니 어쩌면 가급적 멀리 떨어져 살게 하고, 최대한 덜 마주치게 했을까요? 설사 그렇게 해서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혀도 대화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고 목욕탕, 미용실은 혼자 따로 가야 한다면 외로움은 그대로 남고 관심은 점점 더 줄어들 겁니다.

 

현장에서 종종 비슷한 상황을 봅니다. 결핍이나 어려움을 사회복지 서비스나 상품으로 만들어 메우려고 하거나, 그동안 공동체가 해왔던 일을 기술이나 제도가 대신하려고 합니다. 지역사회 관계, 공동체를 약화하는 방식은 괴물 혼자서 잘사는 수단은 만들지 몰라도 정작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는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괴물은 특별한 삶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축사에서 만난 가족들처럼 소박한 삶에서 서로 돕고 나누고 위로하며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고 만나다 보면, 내가 가는 곳에 늘 괴물이 있다면 어느새 그의 자리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수단과 방식이 오히려 괴물을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는 않는지, 그의 삶에 괜한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를 괴물로 보고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선한 품성을 지니고 있고, 지금까지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으며, 어떤 면에서는 도움을 주기도 했지요. 그러나 치명적인 편견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서 다정하고 친절한 친구를 보아야 하는데 혐오스러운 괴물만 볼 뿐이랍니다.’

 

위에서 말했듯 다양한 요인이 차별과 배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나는 누구를 괴물로 보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하지만 당사자를 정말 편견 없이 보고 있느냐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고, 알아도 의식하지 않으면 놓치기 쉽습니다. 또한 종종 미디어에 내가 보지 못한 삶이 그려지거나 인물이 등장하면 그 생소함에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관심을 두고 알고 싶지만 가끔은 ‘왜’를 생각하며 외면합니다.

 

그러함에도 사회복지사이기에 편견에서 보다 자유로운 눈을 가지고 싶습니다. 대체로 당사자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을 때, 문제를 가지고 사회복지사를 만납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일,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사회규범이나 나의 가치관과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 티 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당사자는 어쩌면 알고 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삶을 마주하면서도 학습이 없다면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여도 선입견에 부딪히는 한계는 여전할 것 같습니다. 꾸준히 공부하여 나 아닌 누군가를 괴물로 보는 일이 없다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해가 중천에 떠 있다. 해가 내려와 저 눈 덮인 암벽들 뒤로 모습을 감추고 다른 세상을 비추기 전에, 내 이야기를 다 듣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인간세계를 영원히 떠나 무해한 삶을 보낼 것인지, 아니면 인간들을 응징하고 당신을 순식간에 파멸시킬 악마가 될 것인지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다.”

 

이 문장이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와닿았습니다. 갈등과 혐오가 심화하는 사회에 더 늦기 전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마지막 경고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