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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업가의 책 읽기/사회사업가의 고전읽기

[고진실] 동물농장에 빗대어 본 사회사업 현장

by 구슬꿰는실 2024. 7. 9.




<동물농장>에 빗대어 본 사회사업 현장
: 조지 오웰 「동물농장」


고진실




「동물농장」은 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 소련 스탈린 체제를 희화화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 정치 상황을 풍자하며 부패한 권력에 대해 비판합니다. 당장 현실에 빗대어도 위화감이 없는 것을 보아 세상이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여전히 권력이 오남용되는 사례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남 말에 귀 기울일 줄 알고 겸손했던 사업가나 정치인이, 오랜 시간 권좌에 앉으며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변하는 일은 늘 있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이 약자나 소수의 목소리를 대변했을 때 사회를 단숨에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속성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흉기가 되고 도구가 되는 칼처럼 권력도 쓰는 사람의 의식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모이고 서로 관계하는 곳이라면 규모와 상관없이 권력이 생깁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누군가는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누군가는 권력으로 움직입니다. 즉, 누구도 권력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일하는 기관,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패한 권력’이라는 말 뒤에 현장에서 보았던 여러 모습이 스쳤습니다. 동물농장을 사회복지 기관, 조직에 빗대어 읽었습니다. 성찰과 배움이 있었습니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존즈(인간)가 운영하는 농장에서 동물들은 착취를 당합니다. 이에 반발하여 수퇘지 메이저를 선두로 동물들은 혁명을 일으킵니다. 드디어 동물농장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이 원했던 사회를 건설합니다. 동물이라면 모두가 평등한 곳입니다. 처음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특권을 누리는 돼지들이 나타나고 곧이어 강력한 독재사회가 됩니다. 돼지는 존즈와 똑같이 행동합니다. 어느새 돼지와 인간 서로 구별하지 못할 만큼 닮아갑니다.



이상과 철학

동물들은 가장 먼저 농장 이름을 바꾸고 이상을 담은 ‘일곱 계명’을 세웠습니다. 일곱 계명은 곧 동물농장 법이며 철학입니다. 이상을 이루기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었습니다. 일곱 계명만 잊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다고 자신합니다.
동물들이 일곱 계명을 기억했을까? 대부분 자연스럽게 조금씩 잊었습니다. 고달픈 현실이 의심될 때는 ‘이상’을 재확인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특정 집단 이익에 맞게 바뀐 뒤라 처음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하라는 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부드럽게 벤자민의 갈기를 끌어 일곱 계명이 있는 헛간벽 쪽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잠시 그들은 흰 글자들이 써진 꺼먼 타르 벽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 벽에 쓰여 있는 글들을 클로버에게 읽어주었다. 일곱 계명은 오간데 없고 단 하나의 계명만이 거기 적혀 있었다.
그 계명은 이러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매일 성실히 일해도 어쩐지 헛헛한 마음이 들고 재미가 없다는 사회사업가. 누가 해도 다르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니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이게 사회사업 맞나,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골몰했던 때 나를 돌아보면 사회사업 이상, 복지관의 이상, 지역사회 이상을 생각하며 일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남들이 하고 때마다 유행하는 것을 따르던 일이 많았습니다.

이상이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괜찮을까요? 동물들은 매일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모두를 위한 것이라며 고된 노동도 버텼습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농장이 부흥한 이면에는 순응하며 일한 동물이 있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과에 책임이 있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이상 없이 일한다면 어떤 결과가 될까요? 당사자 삶은 변하지 않고 사회사업가는 소진합니다. 이상을 기준 삼아 성찰할 수도 없으니 시간이 지나도 발전하지 않습니다. ‘약자도 살 만하고 약자와 더불어 사는 사회’가 사회사업 이상입니다. 이상 철학 방향 없이 일하면 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정체성만 찾습니다.


돼지만 탓할 수 있을까

권력 중심에서 다른 동물을 기만했으니 책임이 큽니다. 하지만 부정이 눈덩이처럼 커질 때까지 다른 동물들은 그저 방관 방조했을 뿐입니다. 모르고 당한 순수한 군중보다 어리석고 비겁한 무리에 가깝습니다. 돼지가 권력을 갖게 된 건 다른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글자를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만 갖은 이유를 대며 중간에 포기했을 뿐입니다. 글을 읽고 쓰는 모든 일이 돼지 몫이 되었습니다. 동물들이 돼지가 권력을 잡기 쉬운 환경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권력이 점차 부패하며 모두 의구심을 갖지만 누구도 나서서 질문하거나 저항하지 않습니다. 돼지들도 처음엔 다른 동물들 눈치를 살피지만 갈수록 쉽고 당연하게 부정을 저지릅니다. 처음 석연치 않음을 느꼈을 때 누군가 나섰다면 어땠을까요? 돼지는 자기 행동을 돌아봤을 겁니다. 문제를 자각했다면 개선 노력을 할 것이고, 모른대도 지금까지 해왔듯 뻔뻔하게 행동하지는 못할 겁니다. 어느 쪽이든 작은 불씨가 큰불로 번지는 일은 막았을지도 모릅니다.


우유가 죄다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얼마 안 가서 밝혀지게 되었다. 우유는 매일 돼지들이 먹는 사료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 동물들에게 아주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아마도 존즈가 되돌아오는 것만은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일이 그런 식으로 설명되고 보니 동물들로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 그렇게 해서 우유며 바람에 떨어진 사과(그리고 나중에는 익은 사과들까지도)는 모두 돼지들의 몫이어야 한다는 데
더이상 아무 군말 없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보이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동물들 모습에서 어쩐지 제가 겹쳐 보였습니다. 말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무시하고 침묵했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일이 터지면 원망했습니다. 다른 사람, 외부환경을 탓했습니다.

제도나 법이 바뀌지 않아서, 기관이 변화에 경직되어 있어서, 불합리한 현장을 무던히 넘기는 선배들, 핑계 댈 것이 많았습니다. 반면 같은 질문을 던지는 후배에게 어쩔 수 없다며 방패막이 삼았습니다. 그때는 자기 성찰이랄 것 없이 주어진 업무를 하나씩 해내며 눈앞에 보이는 성취를 얻는 것으로 위안 삼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황은 살피지 않고 탓했던 선배에게 미안하고, 같은 고민하게 만든 후배에게 부끄럽습니다. 권력은 상호 간 힘의 불균형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지 않으려면 권력만큼 견제하는 힘도 커야 합니다.
그 힘을 키우는 것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초심을 지키는 힘

인간 모습을 빼닮은 돼지, 이렇게 변하게 될지 알았을까요? 분명 초심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현장, 조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지만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권력에 취하면 뇌가 변해서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호르몬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초심을 지키려면 흔들리는 때에도 중심을 잡아줄 도구가 필요합니다. 글자를 읽고 쓸 줄 알았던 돼지에게 기록은 좋은 도구가 되었을 겁니다. 농장 운영일지든 일기든 기록했다면 마지막까지 동물농장으로 남지 않았을까요? 글을 쓰는 가운데 생각을 정리합니다. 하루를 돌아보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잘못한 점을 찾으니 조금씩 성장합니다.

동물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곳, 뚜렷한 목적이 있으니 성찰했어야 합니다. 사회사업도 분명한 뜻을 가진 일입니다. 성찰의 도구가 없다면 또 다른 동물농장이 되고 말 겁니다.


자기 실천을 글로 기록하는 가운데 이상을 확인하고, 이를 기준 삶아 자기 위치를 인식합니다. 글은 이정표와 같습니다. 위치를 확인하면 방향을 정하게 되고, 이제 속도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자기 위치를 알면 쉬엄쉬엄 걷기도 하고 때로는 달려가기도 합니다. 열심히 일해야 하는 때도 있으나 바르게 함이 먼저입니다.
「사회사업 글쓰기」 (김세진, 구슬꿰는실, 2022)



사회사업 현장이 동물농장이 되지 않으려면


첫째, 사회사업 이상을 설정합니다.
신년계획은 말할 것도 없이 코앞에 둔 시험을 위해 시간표를 만들어도 그대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목표가 분명해도 실천이 쉽지 않은데 그마저도 없다면 방향도, 방법도 모르니 막막합니다. 이상 없는 사회사업,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데 당사자를 잘 도울 수 없습니다. 임시방편 서비스로 문제를 감출지는 몰라도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상 없는 사회사업가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립니다. 우왕좌왕하다가 금방 소진합니다. 방향이 분명하면 끝까지 걸을 수 있습니다. 눈앞에 목적지가 없어도 걸어야 할 길이 보이니 자신 있게 걷습니다. 걸어온 길을 점검하며 뿌듯해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둘째, 글을 씁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보면 사회사업 기록은 두 가지가 좋았습니다. 하나는 사회사업가인 나를 성장시키는 점, 두 번째는 자기 일에 애정을 키우는 것입니다. 글로써 실천을 돌아보고 성찰하니 사회사업가인 내가 성장합니다. 달라진 것 같지 않아도 기록에서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는 칭찬 인정도 고맙지만,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성장 성숙하는 과정을 보는 즐거움과 기쁨이 더 컸습니다.
기록하며 내 일을 꼼꼼히 살펴보니 애정이 솟습니다. 점점 더 삭막하고 살기 어렵다고 말해도 기록을 보면 ‘따뜻해서 살 만한 세상’을 만납니다. 이 땅의 희망을 발견하고 만드는 일입니다. 알수록 귀하고 할수록 의미 있는 일입니다. 더욱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셋째, 공부합니다.
돼지가 특별히 더 뛰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그저 다른 동물들이 공부하지 않을 때 유일하게 아는 것, 배운 것은 언제든 쓸 수 있게 갖춰진 상태였습니다. 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돼지는 우연히 자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건지도 모릅니다. 다른 동물들도 준비되어 있었다면 결말은 달랐을 겁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도 준비된 사회사업가와 그렇지 않은 사회사업가는 차이가 납니다. 점점 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우리 삶의 모습도 무서운 속도로 다양해집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삶, 예측하기 어려운 일, 온갖 이슈가 넘치는 때 공부하지 않고 당사자를 잘 돕기 어렵습니다.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에서는 ‘전문적 지식과 기술’, ‘전문가’로서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제시합니다. 공부는 선택이기 전에 시대적 요구이자 직업윤리입니다. ‘직업적 양심’입니다.

어리석거나 오만해지고 싶지 않은 사회사업가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먼저 사회사업 이상을 설정합니다. 이로써 옳고 그름을 구별합니다. 꾸준히 공부하며 의식을 깨웁니다. 중심을 세우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상에 빗대어 바르게 일하고 있는지 점검합니다. 기록으로 성찰합니다. 이 세 가지만 붙잡아도 동물농장은 막을 수 있습니다.